이 름 : 
산재보험이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보호하는 명실상부한 사회안전망이 되려면 산업재해 승인 전이라도 선보장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노동자가 의료기관을 방문하면 주치의 판단에 따라 산재보험을 적용하고, 이후에 근로복지공단 같은 산재판정기구가 불승인 대상을 걸러내는 형태로 제도를 운용하자는 취지다. 노동자에게 부여하는 산재입증 책임을 정부로 넘겨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산재제도 개선 과제 중 하나로 부각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노총 산재보험 선보장제도 도입방안 토론회
한국노총은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 대회의실에서 산재보상보험급여의 선보장제도 도입방안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업무상 재해 처리기간은 업무상 사고는 평균 18.5일, 업무상 질병은 175.8일이다. 2020년에는 각각 15.5일과 172.4일이었는데 더 늘어났다. 직업성 암의 산재 처리는 2020년에는 334.5일, 지난해는 301.9일이 걸렸다. 질병은 6개월, 암은 1년가량이 걸린다는 얘기다.
산재 승인 여부를 기다리는 동안 피해 노동자는 건강보험으로 치료받아야 한다. 산재 요양급여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고를 호소하는 이가 적지 않다. 김기우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발제에서 “산재 승인을 받지 못한 채 치료기간이 길어지면 산재보험의 사회적 보호 실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산재 추정 노동자와 그 가족에 대한 적정한 사회적 보호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선보장제도를 도입할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선보장제도는 부정수급 같은 도덕적 해이 문제, 산재 불승인 때 이미 지급된 보험급여 회수 방안 등의 숙제를 가진 제도로 평가받는다. 산재 입증책임을 노동자가 아닌 근로복지공단 등 정부가 져야 운용이 가능하다. 제도는 선보장 후 불승인되더라도 노동자에게 이미 지급한 보험급여의 반환을 청구하지 않는 ‘완전면책형’, 불승인 후 지급 보험급여의 일부를 반환하게 하는 ‘부분면책형’, 불승인 후 지급 보험급여 전액을 반환하게 하는 ‘사후정산형’의 세 가지 형태가 거론된다. 이 중 사후정산형은 보장성을 강화하는 제도로 보기 힘들다.
유성규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참터)는 업무상 질병·사고 불승인 건수를 바탕으로 선보장을 실시한다고 가정했을 때 필요한 재정을 계산해 발표했다. 2020년을 기준으로 완전면책형을 적용할 경우 산재보험기금에서 추가로 부담해야 할 재정 규모를 3천188억8천100만원으로 추계했다. 산재신청부터 결정까지 대기기간 중 얼마의 기간을 선보장할 것인가를 기준으로 필요한 재정도 계산했다. 부분면책형을 적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적립된 15조원 산재기금 활용하면 선보장제 실현 가능”
2020년 기준 사고와 질병을 포함한 평균 산재 처리기간은 39.1일이다. 이를 바탕으로 40일을 선보장으로 요양급여와 휴업급여를 보장했더니 416억3천100만원이 필요했다. 90일로 늘리면 911억4천800만원으로 계산됐다. 보험기금 재정안정성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선보장 기간의 축소를, 사회안전망 역할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기간의 연장을 주장할 것이기 때문에 이 같은 필요재원 추정은 논쟁 과정에서 참고가 될 수 있다.
유성규 노무사는 “산재보험 및 예방기금은 2020년 기준으로 15조1천118억원이 적립돼 있다”며 “적립된 기금을 활용하면 선보장 제도 시행에 따른 재정적 부담은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정부 지원이 추가되면 완전면책형 시행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는 선보장 제도를 운용하는 일본과 독일 사례를 소개했다. 독일은 독일법정재해보험(DGUV)을 통해 민간과 공공부문 법정재해보험 기관들이 조직돼 있다. 이 기구를 통해 산재 예방·감독·치료·재활·보상 서비스를 종합적으로 제공한다.
재계는 선보장제도가 산재 처리기간을 늘리는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강섭 한국경총 안전보건본부 선임위원은 “업무상 질병 신청 사건의 처리기간이 장기화하면서 발생하는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선보장제 도입 검토 필요성을 제기한 것 같다”며 “처리기간 개선은 판정절차와 제도운영 개선을 통해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산재 불승인시 당사자 반발과 후정산 문제 부담을 이유로 산재판정의 공정성과 객관성이 저해될 수 있다는 의견도 개진했다.
